우리가 믿었던 기본값이 사라질 때 — 신뢰의 진공 상태 속에서
한때, 일상이란 ‘기본값’의 집합이었다.
택배기사는 문 앞에 정확히 물건을 두고 가고,
병원 접수 직원은 무표정하지만 절차대로 일처리를 한다.
카페 바리스타는 눈 마주치며 “뜨거운 거 맞으세요?”라고 묻고,
학원 강사는 자기 교재 안에서 성실히 설명을 이어간다.
우리는 그런 행동들을 “기본”으로 여겼다.
굳이 감탄하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그냥 그게 그 자리의 룰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기본값들이 깨지기 시작했다.
알바는 손님에게 반말을 하고,
학교 교사는 사사건건 책임을 회피하며,
공공기관 상담원은 말끝마다 “그건 제 소관이 아니에요”라며 끊어버린다.
경비원은 상황이 터져도 “제 업무 아닙니다”라고 외면한다.
사람들은 묻는다.
“아니, 왜 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그 일을 안 하죠?”
🧠기능을 잃은 자리들: 시스템의 ‘NPC화’
게임 속 NPC(Non-Player Character)는 늘 같은 자리에서 같은 대사를 반복한다.
의미 없는 듯 보여도 플레이어 입장에선 중요한 존재다.
아이템을 사고, 길을 묻고, 세계관의 힌트를 얻는 ‘기본 인터페이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다. 지금 우리의 사회는 점점 더 ‘NPC화된 구조 속에서 NPC 없는 세계’로 향하고 있다.
각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할 자리에서 그 일이 수행되지 않으면,
플레이어(=시민, 사용자, 고객)는 곧장 ‘불신’과 ‘혼란’에 빠진다.
시스템이 무너지는 진짜 이유는 거대한 붕괴가 아니라,
작은 자리 하나하나에서 일어나는 기본의 결핍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시스템 vs. 관계의 해체
우리는 오랫동안 ‘직무’에 사람을 맞추는 문화 속에 있었다.
공무원은 친절해야 하고, 선생님은 지식과 인격을 갖춰야 하고,
알바는 무조건 을(乙)이어야 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런 기대가 무너지고 있다.
자율성, 감정노동 거부, 계약 외 업무 거절이 하나의 흐름이 되며,
사람들은 점점 ‘내가 이걸 꼭 해야 하나?’를 묻는다.
이전엔 조직과 사회가 기본 수행의 가치를 보상했지만,
지금은 ‘위험 회피’와 ‘관여하지 않기’가 생존 전략이 되고 있다.
한마디로 시스템이 인간관계를 해체하며 책임을 전가한 결과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희귀한 기본값’ 찾기
이제 사람들은 기본을 잘 수행하는 사람, 공간, 브랜드를 ‘레어 아이템’처럼 여기게 되었다.
택시 기사에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작은 카페 사장님의 “감기 조심하세요” 한마디에 감동하는 시대다.
기본값은 더 이상 기본이 아니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세 가지다:
- 내가 그 기본값이 되는 것 – 누군가에게는 나도 시스템의 한 축이다. 내가 친절한 NPC가 되면 누군가는 그걸 기억한다.
- 좋은 NPC를 찾고, 추천하고, 연결하는 것 – 신뢰는 입소문으로 회복된다.
- 사라진 기본을 탓하기보다, 새 기준을 만들기 – 지금은 ‘NPC 부재의 시대’다. 그렇다면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디자인할 때다.
🔍결론: ‘기본’의 복원이 아니라, ‘기본’의 재설계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제 '말이 통하는 NPC'를 기대하기보단, 역할을 재설계한 새로운 플레이어들을 조직해야 할 때다.
그게 공공이든 민간이든, 직장이든 일상이든, '기본값'은 누군가의 책임이 아니라 모두의 협업에서 재탄생할 수 있다.
게임 난이도는 올라갔지만, 그만큼 우리의 통찰도 진화할 수 있다.